여름 저녁엔 마당에서 수제비를 먹는다
  • 모용복기자
여름 저녁엔 마당에서 수제비를 먹는다
  • 모용복기자
  • 승인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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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입추(立秋)를 며칠 앞두고 언론사 대선배로부터 소식이 날아들었다. 물론 편지는 아니고 요즘 대세 SNS인 ‘카톡’을 통해서다. 육십 대에 그 분만큼 낭만과 글에 대한 열정을 지닌 분도 찾기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절기(節氣)마다 자연의 변화에서 느낀 소감이나 근황을 전해오는데 솔직히 다 읽은 적은 거의 없다. 답장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사는 게 바쁘다 보니 글 한 줄 쓰는 것도 쉽지 않은 요즘이다. 변명이 아니라 정말 바쁘다. 시간은 많고 할 일도 많지 않은데 답장을 하려 들면 꼭 전화가 온다든가 약속이 잡혀 답신 쓰기를 포기하고 만다.
 그런데 이번엔 다 읽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詩)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빠도 시 몇줄 정도야 하면서 ‘전체보기’를 해보니 7연의 짧은 문장으로 된 경쾌한 시였다. 오십 줄 이상의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했음직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내용이었다. 전문을 인용해본다.
 여름에는 저녁을/마당에서 먹는다/초저녁에도/환한 달빛//마당 위에는/멍석/멍석 위에는/환한 달빛/달빛을 깔고/저녁을 먹는다//숲 속에서는/바람이 잠들고/마을에서는/지붕이 잠들고//들에는 잔잔한 달빛/들에는/봄의 발자국처럼/잔잔한 풀잎들//마을도 달빛에 잠기고//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아! 달빛을 먹는다/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오규원-여름에는 저녁을
 여름 저녁, 시인은 멍석 위에 달빛을 깔고 달빛을 먹었지만 나는 멍석 위에다 파란 포장 비닐을 깔고 수제비를 먹었다.
 거인 같은 산그림자가 대문 밖을 서성이면 마당엔 으레 멍석이 깔리고 그 위에서 방학을 한 누나·형들과 소꿉놀이를 하거나 마구 뛰어다니며 장난을 쳤다. 아버지는 마당 한 켠에 바짝 마른 불쏘시개를 놓고 생솔가지와 풀무더기를 올려 모깃불을 피우셨다. 여름 저녁은 집집마다 굴뚝 연기보다 모깃불 연기가 더 자욱했다.

 하늘에서 비만 제 때 내려주면 특별히 버거운 농사일도 없어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자주 신나는 저녁거리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여름 저녁 먹거리로는 칼국수와 수제비가 단연 으뜸이었다. 밀가루 음식을 맛볼 기회가 잘 없을 뿐더러 맛도 별미였다. 맛뿐만이 아니다. 멍석 위에 크고 둥그런 보자기를 펼쳐놓고 기다란 나무 방망이로 밀가루 반죽을 얇게 미시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끝에 얼굴을 묻고 있노라면 더없이 행복하고 세상은 따뜻했다.
 여름날은 길어 저녁을 물리고도 온 식구가 멍석 위에 아무렇게 눕거나 앉아서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얘기를 한참 동안이나 들은 후에야 밤이 깊었다. 모깃불이 다 타들어갈 때 쯤 어른들은 방에 들어가시고 우리 형제들만 남아 모기장을 치고 이야기꽃을 피우다 조용해졌다.
 그물망으로 된 모기장은 사방이 확 트여 밤하늘이 한 눈에 들어왔다. 별이 참 많기도 많았다. 어느 시인처럼 별을 세다가 동네 여자아이 얼굴이 떠올라 잊어버리거나 잠든 적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작은형은 나처럼 여친 생각 때문인지 밤 늦도록 잠이 안 오는 날이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흥얼거리곤 했다. 야밤에 듣는 유행가는 구슬프고 처량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거의 부르지 않는다.
 여름밤이 아니면 언제 누워서 별을 볼 일이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어른이 되고 나서 누워서 별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아니 서서도 별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렇게 별과 멀어지면서 대단한 삶을 사는 것처럼 부산을 떨었지만 결국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이만 먹었다.
 여름은 확실히 별의 계절이다. 사계절 중 밤에 밖에서 드러누워 별을 볼 수 있는 계절은 오직 여름이기 때문이다. 그 놈의 극성맞은 모기들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올해는 모기가 통 눈에 띄지 않는다. 더워도 너무 더운 나머지 모기들이 제풀에 지쳐 피 동냥하기를 포기한 모양이다. 이번 주말엔 식구들을 데리고 야영장에 가서 별을 실컷 봐야겠다.
 텐트의 천장이 막혀 있어도 좋다. 극성스런 모기들이 없으니 벤치 위에서라도 누워서 보면 될 테니까. 그리고 추억을 선물해준 선배에게 별 이모티콘이라도 보내드려야겠다.
 올 여름은 정말 덥다. 입추가 지난 지 일주일이 다 돼가도 폭염이 꺾일 줄 모른다. 조금만 꿈쩍대도 몸에 땀이 흥건히 밴다. 예전에도 이렇게 더웠을까? 이만큼은 아닐 지라도 덥긴 더웠을 것이다. 선풍기 하나 없이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는지 생각만해도 더워진다. 혹시 별을 세느라 더위를 잊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조금만 느리게 살면 ‘누워서 별 보기’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주말 여름밤엔 떡 하나 입에 물고 별 바라기를 해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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