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고픈 ‘선구자의 고장’ 용정(龍井)
  • 모용복기자
다시 가고픈 ‘선구자의 고장’ 용정(龍井)
  • 모용복기자
  • 승인 201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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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중심가에 있는 용두레 우물가에서 조선족 할머니들이 화투를 즐기고 있다.
▲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경북도민일보 = 모용복기자]  9월도 벌써 중순을 지나고 있다. 거리는 점차 어두운 색을 띠기 시작했으며 뺨에 스치는 바람도 한층 야멸차졌다. 이제 닷새 후면 추석이다. 기나긴 폭염을 견뎌낸 들녘의 벼들은 묵념이라도 하듯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취업난(難)’ ‘실업대란’ ‘자영업 줄도산’ ‘집값 파동’을 나타내는 암울한 경제지표들이 연일 메인뉴스를 장식하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더없이 넉넉해지는 풍요의 계절이다.
 황금들녘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의 실타래가 한 곳에 머문다.
 그곳은 타국이 아니었다. 정겨운 우리들의 옛 농촌이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푸른 옥수수밭을 지나니 눈에 익은 들녘과 강과 시내(개울)가 나왔다. 넓디넓은 들판엔 온통 황금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바로 ‘별의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요 항일독립투사들의 혼이 서린 곳, 용정(龍井)이다. 중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에 유독 벼농가가 많은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용정은 필자가 지난해 이 맘 때 중국 동북3성을 취재하고 돌아오기 위해 연길(옌지·延吉)공항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른 곳이다.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에 속한 용정시는 주민 대부분이 조선족이다. 거리의 간판들도 한글로 돼 있다. 한자는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씌어 있어 한국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간판 뿐만 아니다. 이 전에 방문했던 다른 도시들과 달리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으며, 생김새도 어딘가 달랐다.
 현대식 건물이 늘어선 시내 한복판에 잘 단장된 우물이 하나 있다.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용두레 우물이다. 그 옛날 독립투사들이 고단한 몸을 잠시 기대고 목마름을 달랬던 곳이리라.

 공원 내 우물가에서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화투판을 벌이고 있었다. 대낮에 그것도 시내 중심가에서 이런 모습을 보다니. 신기해서 다가가 인사를 건네니 할머니 한 분이 무언가 손에 쥐어주셨다. 까치복숭아(개복숭아)다. 멀리 이국에서 느낀 고향의 정에 콧등이 시큰했다. 조선족 안내원이 제공한 생수 외에 중국 취재 일주일 동안 현지인들에게 무엇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성격이 괴팍한 한족(漢族) 기사가 내내 퉁명스런 태도로 대하는 바람에 나는 기분이 영 언짢았다. 나이도 젊은 놈이 말투와 행동거지가 여간 시건방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날 그를 떠나보내면서도 끝내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 이제 다시 보지 않을 처지에 괜한 인심을 쓸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용정 시내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을 두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는 지금은 없지만 해란강은 굽이굽이 흘러 벼를 자라게 하고 조선인들의 삶과 인정을 살찌우고 있었다.
 나는 중국 동북지방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적을 취재하면서 우리민족의 찬란했던 역사에 수없이 가슴이 벅차올랐으며, 단동지방을 지날 때는 압록강 너머 건듯건듯 보이는 북한 소년들의 초췌한 모습에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다. 또한 웅장한 광개토대왕비 앞에서는 중국 공안의 매서운 눈초리에 절망했으며, 한민족의 본향(本鄕)인 백두산에 올라서는 관광굴기 중국의 개발 차바퀴에 신음하는 천지(天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륙에서 한민족의 숨결이 끊어져가고 있음을 통감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기우(杞憂)였는지도 모른다. 취재여정 끝자락에 들른 용정에는 여전히 우리 선조들이 말 달리던 해란강이 흐르고 있었고 용두레 우물가에는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한민족의 정기(精氣)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10여㎞ 가면 명동촌(明東村·‘동쪽(한반도)을 밝힌다’라는 뜻)이 나온다. 이 곳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을 토하던 생가 관리인이자 마을 촌장인 송길연 씨는 잘 계시는지 별과 바람에게 안부를 묻는다. 그는 윤동주의 먼 친척뻘이 된다고 했다. 답례조로 1만원을 주고 산 ‘윤동주 평전’은 양장본에 눈이 익은 탓에 곧바로 책꽂이에 들어가 지금까지 먼지만 이고 있다. 다음에 그를 만나면 결단코 책은 사지 말아야겠다.
 선구자의 고장 용정.
 나는 꿈을 꾼다. 언젠가 ‘별의 시인’을 만나 그가 못다 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겠노라고. 독립투사들의 흔적을 속속들이 밟아 그들의 애환과 불굴의 정신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여적(餘滴)은 해란강에 띄워 보내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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