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별을 세던 밤
별을 세던 밤이 있었다. 기온은 낮았고 나는 혼자였다. 주머니에 든 것이라고는 쳇 베이커의 음악이 들어 있는 휴대폰과 먹다 남은 초코바, 볼펜 한 자루였다. 노트는 없었다. 나는 문득 서글퍼졌다. 별은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것은 광활한 대양을 수놓은 함대처럼 진격하는 듯 했지만 아득하고 아련해서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 빛이야말로 별의 유언이라 할 수 있었다. 별은 이미 죽어 비로소 별이 된 것이다.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쳇 베이커의 음악을 들었다. 그는 먼 훗날 이국에서 태어난 사내 앞이라 해도 공평하고 정중하며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그는 나의 존재를 가늠하지 못할 것이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저 별과 나의 물리적 거리가 무용하듯이.
멜버른에서 V-line을 타고 3시간을 더 가면 stratford 마을이 나왔다. 이곳에 온지 열흘 즈음 지나자 잠자리도 음식도 바람도 별도 차츰 익숙해졌다. 하지만 외떨어진 농가에서 지내기란 여간 지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달리기를 하기로 했다. 목적지는 가까운 계곡이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해는 등 뒤로 기분 좋게 내려앉았다. 쳇 베이커의 잔잔한 연주를 들으며 달리자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긴 어느 때고 쳇 베이커는 동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건 그의 음악은 늘 곁에 있었다. 제주의 돌담 옆을 거닐 때나, 파리의 묘비를 둘러볼 때나, 구룡포의 일본인 가옥을 찾을 때나, 필리핀 세부의 재즈 바를 전전할 때에도. 처음에는 글을 쓸 때의 배경음악으로 그를 찾아 들었다. 여리게 흔들리는 목소리와 주저하는 트럼펫은 자극적이지 않은 선율 속에서 긴장을 끌어내며 집중도를 높였다. 점차 그는 술자리에도 친숙하게 나타났다. 밥을 먹는 동안, 청소를 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잠들기 전이나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에도 그는 여지없이 찾아왔다.
-Almost blue
그는 늘 취한 기운으로 나를 만났다. 취한다는 건 때론 자신의 마음 가까이 귀를 기울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는데, 그의 목소리는 내면과 거의 맞닿은 것처럼 어눌해 보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주절거리는 말은 모든 게 노래고, 긁적이는 편지는 모든 게 시일 텐데. 쳇 베이커는 자신을 감싸 안은 감정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처럼 느리게 노래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약에 찌들어 최후를 맞이한 그에게 이토록 마음이 가다니. 중성적인 목소리, 잔잔한 톤, 불안한 기운, 플랫된 음정, 몽롱한 눈빛. 그는 다음 곡을 부르는 것을 망설이는 듯 나지막이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숨에 매혹되어버렸다.
-쳇 베이커의 잔향
쳇 베이커는 어느 때고 나를 밤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의 음악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나 자신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초조함을, 앞으로도 찾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을 은밀히 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어디서나 언제나 불행하다면 별을 세는 쪽이 낫지 않을까.
그를 맞이하기 위해 몇 가지 준비를 해도 좋을 것 같다. 어둠이 짙어야 하겠고, 누구도 없는 집의 거실이면 좋겠다. 서서 듣기 보다는 앉아 듣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와인이 한잔 있어도 좋겠다. 오래되고 향이 진한 적포도주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조명은 그윽하고 바닥은 차고 밖은 겨울이라면. 그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어떤 지독한 모습을 비추는 유리창 같다. 오늘은 밤하늘이 유난히 캄캄하다. 나는 별의 탄생을 본 것일까, 별의 무덤을 본 것일까. 별을 세던 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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