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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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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어사 둘레길을 한 바퀴 돌고 주차장 벤치에 앉아 쉬면서 사찰뒤편의 절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도 비켜 날아가는 가파른 바위절벽에 매달린 듯 서 있는 나무 몇 그루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참으로 강인한 생명력이다. 어떻게 버티었을까. 한 겨울 내내 할퀴던 칼바람을, 어찌 참아 내었을까. 물 한 방울 머물지 않는 절벽에서 가물던 염천에 타는 갈증을, 무슨 내력(耐力)이 있어 부러지지 않았나. 거목도 쓰러뜨린 지난여름의 태풍을.

그 나무를 바라보며 운명과 숙명에 대해 생각했다. 오래전 바람에 흩날리던 여린 작은 씨앗이 절벽 바위틈 사이에 떨어졌을 것이다. 새벽이슬 한 방울 부여잡고 발아된 씨앗은 너무도 척박한 자리 한탄할 겨를도 없이 여린 작은 뿌리가 바위를 움켜잡았을 것이다. 날려가지 않으려 떨어지지 않으려 생채기가 생겨도 참으며 캄캄한 바위틈 파고들어 돌부리 붙잡고 온 힘을 다해 매달렸을 것이리니 지쳐 쓰러질 때면 이 삶을 그만 포기할까 절망에 허덕이기도 하였으리라. 홀로여서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많이 울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 악물고 살아낼 수밖에. 얼마나 아팠을까. 해가 바뀌고 가지에 잎이 돋던 어느 봄날, 하늘 향해 올곧게 서려 제 허리를 비틀 때.

모진 세월 견뎌낸 두 팔 벌린 가지에 해마다 나뭇잎은 푸르렀으리. 가을이면 바위 틈틈마다 붉고 노랗게 물들여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으리. 그래서 볼품없던 바위산을 수놓듯 아름다운 풍경으로 만들어 아래 있는 고찰과 함께 이 지역의 명소가 되게 하였으리라.

숙명은 정적이며 필연적이다. 숙명을 한자로 풀이해보면 잘 숙(宿)자에 목숨 명(命)자로서 잠든 목숨이란 의미다. 내 부모, 내 나라를 바꿀 수 없듯 이미 정해져 있는 불변의 영역이다. 절벽 바위틈에 떨어진 씨앗처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형성된 것이며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운명은 동적이며 가변적이다. 운명은 운전할 운(運)자에 목숨 명(命)자를 쓴다. 스스로 움직이는 목숨이란 뜻으로 인생을 운행하는 것은 자신이므로 자신의 마음가짐과 노력여하에 따라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에 쥐고 있으므로 삶은 완전히 자신의 작품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운전자이며 운명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처럼 보여도 우연이 아니다. 과거에 우리가 엮어온 패턴들이 움직인 결과이다. 사람들 개개인은 모두 숙명적 객체이지만 운명에 대해서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절벽에 선 저 나무, 너는 숙명엔 충실했고 운명과는 싸워 이겼구나. 너를 보니 알겠다. 역경 속에 핀 꽃이 아름다운 이유를. 추레한 절벽을 비경으로 만들어 낸 가늠할 수 없는 가치를. 나도 저 나무처럼 살자. 나도 저리 살아내자. 가혹한 자리에서 절망하거나 한탄하지 아니하고 꿋꿋이 헤쳐 나온 사람이 온 세상의 찬사를 받듯, 척박한 숙명의 자리를 원망하지 아니하고 충실히 살아내어 비경으로 바꾸어 놓은 너에게 가없는 찬사를 보낸다.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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