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산책, 딸의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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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산책, 딸의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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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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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아침은 오래 전부터 새벽 다섯 시에 열린다. 집 근처 산책로를 걷는 새벽운동 때문이다. 거의 닳아버린 연골로 거의 매일 이어진 엄마의 새벽길은 근래 들어 딸의 근심이 됐다.

엄마에 따르면 얼마 전 운동을 나가려는데 현관 밖에 기척이 들렸다. 엄마가 ‘누구요’하니 다급하고 불온한 남자 목소리가 났다가 멀어졌다. 전에 없던 일이라 팔순 노모의 심장이 쿵쾅 뛰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조심히 문을 여는데 ‘누리끼리한 쌀 포대자루 같은 게’ 문 옆으로 쿵 쓰러졌다.

너무 놀라 소리도 못 지르고 쳐다보니, 웬 여자가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자고 있는 것 아닌가. 엄마는 집안 우산꽂이의 우산을 펴서 안쪽으로 여자를 가리고 깨우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귀가 중이었다는 여자는 자신이 왜 그런 상태로 그곳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관절 때문에 아파트 1층에 모신 노모에게 난데없는 쌀자루의 습격은 가족 모두의 충격이었다. 엄마가 새벽을 나설 때마다 온 가족이 갖은 방법으로 운동을 만류했지만 운동은 계속됐다. 여자는 아파트 거주자는 아니었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아는 남자가 이웃이자 성폭행 가해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후 CCTV 분석, 현관 비밀번호 등 조처를 했고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상실이자 훼손은, 성취감으로 가득했던 엄마의 오롯한 새벽시간이었다.

이날의 해프닝으로 불안은 우리 가족에게 구체적으로 전이됐다. 이를테면 TV에 검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흉악범의 실루엣을 볼 때마다 입술이 마른다. 실루엣은 희끗한 산책로를 걷는 여성 노인과 멀찍이서 뒤따라오는 그림자였다가 주문고객이 알려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밤엔 다른 용도로 기억해내는 배달원의 헬멧이었다가 잠든 여성손님을 태운 채 도시의 어둠을 누비는 룸미러 속 택시기사가 됐다. 입이 마르다가 불안은 망상으로 번진다.

만약 나였다면? 우리 엄마였다면? 내 십대 조카였다면?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조심하고 예방하고 경계하고 긴장하는 모든 심리적 물리적 비용은 왜 번번이 당하는 쪽이 지불해야 하지?

다시 한 번 쌀자루의 습격을 받으면 엄마는 한 번 겪어낸 일이니 더 용감해질까? 천만에, 문밖에 전단지 붙이는 소리만 들려도 이거 뭔 소리냐 한다. 그럼에도 새벽 다섯 시면 둔하고 느린 걸음으로 문을 나선다. 고깟 얼굴도 모르는 놈 때문에 아침 운동을 포기할 순 없단다. 노모의 뒷모습은 위태로운 반면 ‘안전한 산책’을 바라는 강렬한 믿음도 함께 준다.

엄마의 조그만 등이, 왼쪽으로 살짝 기운 몸이, 오히려 나이를 더 드러내는 새치 하나 없는 까만 뒤통수가 나를 다독인다. 매일 갱신하는 하루치의 성취, 스스로를 믿는 힘만이 불안을 이길 수 있다고.
안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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