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패러다임의 전환, 징벌배상과 집단소송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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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패러다임의 전환, 징벌배상과 집단소송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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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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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규제혁신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기업활동을 옥죄는 각종 규제를 폐지해 달라는 요구들도 함께 나온다. 그러나 모든 규제가 도입된 데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기에, 그중에서 옥석을 가리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규제샌드박스’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현행 규제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 출시가 어려운 경우 임시허가·실증특례를 허용했다. 지난해 9월 정부 발표에 의하면, 규제샌드박스를 통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2년 반 동안 509건의 승인이 이루어져 1.9조 원 규모의 투자유치, 839억 원 규모의 매출증가, 3800여 명 규모의 고용창출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규제완화가 새로운 투자와 매출, 고용을 이끌어낸 것이다.

대한민국 규제의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규제의 패러다임은 ‘기업활동을 자유롭게 허용하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책임을 묻는다’는 원칙과 방향 하에 설계되고 또한 지속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디지털 전환, 자율주행과 미래차, 기후위기와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확대, RE100 등 다양한 변화에 조응하여 우리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기존의 아날로그식 규제 패러다임으로는 기술과 사회의 변화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기업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에 대한 우려도 해소되어야 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자동차 배기가스 조작 사건, 침대 매트리스 라돈 검출 사건, 신용카드사 개인정보 대량유출 사건, 대형마트 개인정보 매매 사건 등과 같이,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한다.

사실 한 개인이 자본과 조직을 갖춘 기업으로부터 손해를 배상받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징벌배상, 집단소송 및 증거개시제 도입 논의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소액·다수 피해자들의 피해구제를 더 용이하게 하자는 것이다.

징벌배상제도는 ‘악의적인 불법행위로 돈을 버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논의되고 있다. 기업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불법행위로 인하여 지출하게 될 비용이 그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크다면, 불법행위를 할 유인은 그만큼 줄어들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20여 개 개별법을 통해, 특정 분야에 대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3~5배를 한도로 배상하게 하는 징벌배상제를 도입한 상태이다.

그러나 징벌배상제가 도입된 분야만 불법행위가 억제돼야 하는 것은 아니고, 현행과 같이 특정 사안에 관한 사회적 논란이 생길 때마다 그 분야에 한하여 징벌배상제를 도입하는 방식은 효율적인 입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제21대 국회에서는 2개의 의원발의안을 통해 징벌배상을 특정 분야에 국한하지 말고 전 분야로 확대하자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법무부도 2020년 9월 상법 개정안의 입법예고를 통해, 징벌배상의 적용범위를 상거래 일반으로 확장하는 입법을 제안한 바 있다.

집단소송 제도는 동일 사안으로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경우 피해자 중 일부가 대표로 나머지 전원을 위해 소송을 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이 시행되어, 증권분야에 한하여 이미 집단소송 제도가 도입되어 있다. 집단소송 제도를 활용하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피해자들도 한꺼번에 가해자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증권분야 외 다른 분야에는 집단소송이 도입되어 있지 않은 탓에, 소액·다수 피해자들이 가해기업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 개별적으로 가해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집단소송제가 도입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사모펀드 대규모 환매중단 사태 등의 경우에도 만약 우리나라에 집단소송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면 피해자 구제가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제21대 국회에서는 7개의 의원발의안을 통해 집단소송의 적용범위 확대가 논의되고 있다. 집단소송제 확대는 문재인 정부 법무부에서도 2020년 집단소송법안에 대한 입법예고를 통해 집단소송의 적용범위 확장을 제안한 바 있다.

증거개시 제도는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휴대전화를 포렌식하여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것처럼, 민사소송에서도 법원의 통제 하에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증거를 확보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디스커버리’라고 불리는 이 절차는 ‘적어도 사실을 속이고 책임을 피하는 일은 없게 하자’는 취지 하에 논의되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사고를 예로 들어보면, 주된 증거에 관한 관리통제 권한을 가진 것은 기업 쪽이고, 피해자로서는 증거를 확보하기에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증거개시 제도 하에서는, 기업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숨길 수 없게 된다. 사법절차에서 사실관계가 남김 없이 확인될 수 있다면, 법원 판결에 대한 예측가능성도 높아지고 하급심에 대한 승복률도 높아지게 될 것이다.

증거개시 제도에 대해서는 제21대 국회에서 민사소송법 개정안을 통해 논의되고 있고, 법원과 법조단체에서도 이 제도의 도입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규제체계를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네거티브 시스템이 도입된다고 하여 기업의 모든 행위가 무한정 허용된다는 말은 아니다.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부합하는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피해에 대한 우려가 우선 해소되어야 한다. 경제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명, 신체, 안전, 환경에 대한 위협이나 사고에 대해서는 분명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

징벌배상, 집단소송 및 증거개시 제도의 도입을 통해 기업들의 불법적인 이윤추구 유인을 줄일 수 있다면, 더 나아가 경제활동 관련 형벌을 축소하는 논의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하도급법의 경우 동일한 불법행위에 대해 공정위로 하여금 하도급대금 2배 이내의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하도급대금 2배 이내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조항을 별도로 두고 있어, 형벌규정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만약 법 위반행위가 있더라도 사실관계를 감출 수 없다면, 그래서 법 위반행위에 대해 마땅한 불이익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여기에 적용되는 형벌을 없애 기업활동의 자율성을 더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입법의 방향일 것이다.

규제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징벌배상, 집단소송 및 증거개시 제도가 논의되는 이유이다.

오기형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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