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면 입암·경주성·소태고개까지
포항·경주 등 경북 곳곳에 흔적 남아
1915년 결성 광복회 유공자 후손들
“아직 인정 받지 못한 유공자들 많아
합당한 예우·보훈 복지 위해 노력”
사적지를 통해 보는 독립운동 활동의 흔적
본지는 광복절 78주년을 맞아 대구와 경북 지역의 중요한 역사적 사적지를 통해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굴하고 이를 통해 지역 사회의 역사와 자부심을 강화하고자 한다. 독자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동을 전달하며,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총 5회로 나눠 진행한다. 국내 4개 지역과 일본 군수기업 미쯔비시가 운영하던 하시마탄광의 조선인 징용공들의 강제 노역과 경제 착취로 인한 고통과 저항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군함도를 취재한다. /편집자 주
6호 태풍 카눈의 진로 변경으로 전국 지자체마다 피해 대비에 분주하다. 한반도는 9일부터 태풍 영향권에 들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100여년전 국권을 침탈 당했을때도 우리 선조들은 광복의 희망을 놓지하고 결연한 의지로 일본군과 맞섰다.
8일 무겁게 내려 앉은 하늘 만큼 무거운 마음으로 청하면 덕성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를 찾았다.
지난 5월 코로나19 엔데믹 선언이후 3년4개월 이후만에 국민들은 일상으로 돌아 왔고 봇물 터지듯 해외여행을 떠났다. 지난 7월31일 한국관광공사와 일본관광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312만9천명으로 한국을 찾은 일본인(86만2천명)의 3.6배였다. 한국인이 ‘일본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숫자로 밝혀졌다.
청소년들이 외국여행을 하며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문물을 체험하고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부모의 손을 잡고 국내외 항일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독립운동 사적지는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강한 국민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다.
1919년 3월22일 덕성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펼친 곳이다.
청하면 덕성 장날에 일어난 만세운동은 덕성리 오용간과 송라면 대전리의 윤영복에 의해 기획됐다. 이들은 3월18일 경, 대전교회당 등지에서 여러 번 협의해 3월 22일 장날을 거사일로 잡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교인 23명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22일 오후 1시경, 많은 사람들이 장터로 모여들자, 오용간, 윤영복 등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주었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500여 명이 여기에 호응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시위군중은 덕성리 일대를 돌며 만세시위를 전개했으나, 출동한 일본 경찰의 진압으로 강제 해산됐다.
이로 말미암아 23명이 체포됐으며, 그 가운데 오용간과 윤영복은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포항에서는 2001년 송라면 대전리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을 건립했다.
▲산남의병 전투지 - 죽장면 입암
1907년 9월 산남의진이 일본군을 맞아 전투를 치르다 정용기, 손영각, 이한구 등이 순국한 곳이다.
1907년 8월 하순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는 관동으로 북상하기 위해 본진 선발대 100여 명을 거느리고 영일군 죽장면에 주둔했다.
이때 일본군이 청송 방면에서 입암으로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정용기는 우재룡, 김일언, 이세기 세 부장을 각기 길목에 매복시키고, 자신의 본대는 9월 1일 새벽에 입암을 기습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세기 부장이 입암에서 일본군 수 명을 발견하고 성급하게 공격하다가 적의 복병에게 집중공격을 받아 패했다.
이때 정용기는 갑작스런 포성을 듣고 밤중에 입암으로 진군하다가 일본군과 새벽까지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 수십명의 장정들이 전사했다. 이로써 산남의진의 지휘부는 무너지고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이 달려와 남은 의진을 수습해 인솔했다.
▲경주연합의병 전투지 - 경주성
1896년 6월 17일 경주연합의진이 경주성을 공격했다.
김하락의진은 1896년 5월 청송 감은리전투 이후 포항 입암을 거쳐 경주로 이동했다. 이에 김병문, 이시민, 서두표 등이 연합의진 결성을 제의해 경주연합의진이 결성됐다. 경주연합의진은 조성학을 선봉으로 하여 6월17일 경주성 동문과 북문을 공격했다. 경주성을 점령한 경주연합의진은 각 면에 창의에 호응할 것을 요청하는 격문을 보냈다. 또 22일에는 공격해 오는 관군을 물리쳐 성을 지켰다.
하지만 대구부 관찰사가 23일 일본군 수비대를 앞세우고 경주성을 공략하자, 경주연합의진은 그만 패배하고 말았다. 김하락 의진은 잔여 의병들을 이끌고 영덕을 경유해 영해로 들어가 영해의진과 합세했다.
▲경북 우편마차 습격 의거지 - 소태고개
1915년 12월 24일 권영만과 우재룡이 세금 운반 우편마차를 습격한 곳이다.
1915년 박상진은 채기중, 유창순, 김경태 등과 함께 대구에서 광복회를 결성했다. 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해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혁명기지로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했는데, 이같은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총독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됐다.
당시 광복회 회원인 권영만과 우재룡은 일제가 경주, 영일, 영덕 등지에서 거둔 세금을 대구로 수송할 때 이를 빼앗기로 계획하고, 1915년 12월24일 새벽 광명리 효현교와 소태고개에서 마차를 기습하여 8,700원을 군자금으로 확보했다.
광복회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찾아서
광복회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및 그 유족·후손들이 결성한 단체이다. 1915년 8월25일 국권 회복과 독립을 꿈꾸던 청년들이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를 결성했으며 총사령에 고헌 박상진이 추대됐다. 광복회는 조선 팔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사령관 김좌진 파견, 군자금 모집 활동, 친일부호 처단 등을 전개했다. 8일 태풍 카눈의 영향으로 무더위가 한풀 꺾인 날 광복회 활동을 펼치고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광복회 경북지부 이용훈 포항지회장
이용훈(54) 지회장은 이인술 애국지사(1925.6.13~2017.9.29)의 3남 7녀중 9번째 자제로 현재 포항지회를 이끌며 포항수협 죽도지점장으로 있다.
이인술 애국지사는 경북 영덕 출신으로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수산학교 재학 시 항일활동을 결심했다.
1941년 일본 규슈, 오사카 등지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독립문과 태극기 배포 등 활동을 하다가 1943년 6월27일 체포됐다. 1944년 10월 5일에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으로 출옥했다.
정부는 이인술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뮤지컬 ‘영웅’에서 배우 안재욱이 이인술 애국지사역을 맡아 화제가 됐다.
이용훈 지회장은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공헌한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게 국가가 합당한 예우와 걸맞는 복지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했다.
▲광복회 경북지부 이신규 대의원
이신규(69) 대의원은 이갑룡 애국지사(1925.11.7~1989.3.27)의 아들이다. 이 애국지사는 1944년 10월 경북 안동에서 안동농림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조선회복연구단을 조직하고 교화부를 담당했다. 독립을 위해 운동하다 피체포 돼 5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광복이 되어 기소 유예로 출옥했다. 건국훈장 애족장(1999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이신규 의원은 “아버지께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학생시절 학생운동을 하셨기에 생전 모습을 가까이서 뵐 수가 있었다”며 “가끔 그때 옥고를 치르셨던 당시 일을 회상하시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광복회 경북지부 손진식 포항지회 운영위원
손진식(81) 어르신은 손영술(1882.6.13~1969.12.2) 애국지사의 손자로 포항시에 거주하고 있다.
손 애국지사는 영일 사람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죽장면 입암 산남의진에 참여해 초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별래현에서 일본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가 탈옥했다. 일제는 관직을 미끼로 회유하려고 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부했고 결국 그의 모친은 옥사하고 가옥은 소실됐으며 부인은 자결하는 참사를 겪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손진식 어르신은 “조부께서는 의병으로 활동하셨는데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남다르셨다”며 “우리는 표창장도 받고 공훈을 인정 받았지만 아직 인정 받지 못하고 힘든 생활을 하는 많은 후손들을 위해 보훈 복지가 잘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자료제공: 경북남부보훈지청
도움주신분들: 경북남부보훈지청 금광호 팀장·김명화 주무관, 청하면 김동희 부면장, 박보결 경주시립극단 지부장.
참고문헌:「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서3」(2017,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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