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동의 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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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동의 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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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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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동 한 그루 마당을 지키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담장이 허물어진 지 오래다. 돌쩌귀에 삐뚜름히 기대있던 삽짝은 주인을 기다리다 집 밖으로 엎어졌다. 손길 닿지 않은 텃밭 한 모퉁이에 흰 별 부추꽃이 소복이 앉았다. 장독대엔 촛불 맨드라미 한 송이 가을볕에 그리움처럼 검붉다. 늙은 오동나무 때마침 지나는 바람에 이파리 하나를 툭 떨군다.

아버지는 언니가 태어났던 해 마당에 벽오동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나무는 언니보다도 훨씬 빨리 키를 키웠고 얼마 안 가 돌담 밖을 내다볼 만큼 자랐다. 하지만 언니는 오동나무와 키를 맞추어 볼 새도 없었다. 처녀 적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엄마는 출산 후 백일도 되기 전에 딸을 친정으로 보내야 했다. 그 바람에 오동나무는 여러 해 동안 별들의 입맞춤에도 휘영휘영 불면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언니의 오동은 목재로는 쓰임새가 없을 만큼 한편으로만 삐뚜름하다.

오동나무는 목질이 부드러우면서도 마찰에 강하여 그 쓰임새가 많다. 상자를 만들어 수의를 보관하기도 하고 관을 짜서 죽음에 채비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나뭇결은 탁자나 장롱 등 가구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이다. 소리의 울림과 전달하는 성질이 좋아 거문고, 가야금, 비파 같은 악기를 만드는 데에도 으뜸으로 친다. 오동은 빨리 자라기도 해서 식목한 지 10년이 되면 목재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혼수를 대비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러면 나는 딸을 위하여 무엇으로 준비를 할까 생각해 본다.

올해 들어 딸은 부쩍 혼자 나가서 살겠다고 한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겠거니 귓등으로 흘렸는데 공인중개사며 경매사이트까지 알아보는 게 예사롭지 않다. 거기에 계획이 꽤 구체적인 것에 적잖이 놀랐다. 성인이 된 자식이 부모의 보살핌 없이 살아보겠다고 하는데 마땅히 거절할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곧 결혼이라도 하면 내 곁을 떠나게 될 텐데 굳이 미리 분가하여 혼자 살겠다고 하니 내심 걱정과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아침마다 깨워야 겨우 일어난다. 음식은 물론이고 청소며 빨래까지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출근 때마다 온 집을 발칵 뒤집어 놓다시피 하고 제 몸 하나 빠져나가기도 바쁘다. 그런데도 독립해서 혼자서 산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러고 보면 나는 서른에 엄마가 되었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직장 인턴을 시작으로 살림에 대해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부모의 성화에 쫓기듯이 결혼했다. 초기엔 친정을 생쥐 곳간 드나들 듯 아침저녁 들락거려야 했다. 한여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조마조마했을 친정엄마의 심정이 새삼 헤아려진다.

언니의 벽오동이 올해로 예순다섯 해의 가을을 맞이했다. 때맞춰 떨어진 까만 열매들이 바닥에 즐비하다. 태풍을 동반한 한여름 장맛비에도 단단히 잡고 있던 잎들을 무심하게 떼어낸다. 푸른 물 짙은 청보랏빛 꽃 진 자리에 떨켜를 잡고 매달린 열매를 이제는 독립하라는 듯 오동은 속절없이 밀어낸다. 투두둑 투두둑. 어제와 오늘을 쌓아 나이테만큼 단단해진 인연일 텐데 저리 담담히 떨구어 낼 수 있을까.

나무의 수명은 대체로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이다. 해를 거듭할 때마다 명징한 나이테를 새기며 생을 기록하기에 나무의 수령을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는 고목일수록 속을 비우며 사는 것도 있다. 오동나무는 오래 묵을수록 겹겹의 나이테 맨 안이 동그랗게 비어있다. 그래서 나무로 작품을 빚는 작가는 비어있는 공간에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을 채워넣기도 한다. 한가운데가 뚫린 나무의 단면을 보고 있으면 나이가 들수록 비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삶도 나이가 든다는 건 내면의 집착과 욕심을 덜어내는 일일 것이다.

아일랜드의 선장들은 바다에 암초들의 위치를 낱낱이 알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배의 밑바닥으로 그 암초들을 일일이 긁어보았기 때문이란다. 혹여나 실패할까, 실수할까, 걱정이 앞서 미리부터 자식에게 아는 길만을 답습하게 하는 건 부모의 그릇된 집착이며 욕심일 것이다.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치면 대처할 능력을 갖출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은 온전한 자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넘어지기도 하고 길을 잘못 들어 돌아가다 보면 또 다른 새로운 길이 펼쳐지지 않을까. 들메끈을 고쳐 매고 이제부터 새로운 음계를 걸어갈 딸아이의 앞날을 응원할 일이다.

가을걷이 끝낸 들판에 약 볕 햇살이 다발로 이어진다. 마음을 다잡아본다. ‘벌레도 배꼽 떨구면 저 살아갈 줄 안다.’라는 말이 있다. 하물며 사람으로 태어나 서른 해, 저 혼자 살아가는 게 무슨 대수일까. 내년도 이제 몇 날 남지 않았다. 봄이면 성심껏 싹을 틔우고 꽃을 맺어 가을에 고운 단풍이 들면 연연 없이 열매와 잎을 떠나보내는 나무. 나무에서 떨어져나온 열매만이 새봄 경이로운 생명을 틔우고 성장할 것이리라 믿는다.

딸의 방문을 열어본다. 바닥에 젖은 수건이며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를 질끈 묶고 부기 덜 빠진 얼굴로 허둥지둥 시간과 한바탕 출근 전쟁을 한 모양이다. 방에는 어릴 적 목덜미에서 나던 새끄므리한 젖비린내와 제법 성숙한 숙녀의 향기를 섞어 어질러놓고.

태어난 딸을 위해 오동나무를 심었던 아버지, 세상으로 홀로서기 하는 딸을 위해 이제 벽오동은 그 마음을 단단히 먹어본다.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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