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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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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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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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유명도시에는 오래된 교회들이 많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도 있고, 현대도 예배를 드리는 성전으로 사용되는 곳도 있다. 하지만 문을 닫고 유지비만 들어가는 곳도 많다. 일부는 공공시설로 전용하지만 그래도 남는다. 그런 공공용도 중 하나가 다빈치 박물관이다.

약간은 관광객용, 어린이용으로 포장된 곳이 많아서 일일이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로마에서도 베네치아에서도 보았다. 너무 흔하게 봐서 도시가 일일이 기억나지도 않는다. 레오나르도의 고향인 빈치 마을에도 다빈치 뮤지엄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존경을 받는다. 성격적으로는 배울 게 하나도 없고, 만든 작품은 얼마 되지 않고, 완성한 작품은 하나도 없는 사람이 이처럼 존경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74년 22살 때 피렌체에서 거의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수태고지를 그렸다. 이 작품은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 청년 다빈치는 범상치 않은 천재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2년 후에 레오나르도는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가 동성애자였느냐는 논의는 지금까지도 설왕설래 중이다. 몇몇 유력해 보이는 정황증거가 있지만, 동성애를 단정할만한 증거도 아니다. 이런 건 개인사라 우리가 따질 내용은 아니지만 레오나르도에게는 피렌체 생활을 접는 계기가 되었다. 방랑하던 그는 1482년 밀라노의 스포르차 궁전에 취직한다.

스포르차 가문의 창시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용병대장에서 시작해서 밀라노의 지배자가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문화적으로는 르네상스라는 화려함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정치 세계는 말 그대로 약육강식, 하극상, 정글매치의 시대였다. 마키아벨리는 오늘날 냉정한 혜안을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를 폄훼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즘’ 따위는 그냥 일상의 풍경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시대에 르네상스가 피어났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원래 혁신은 파괴에서 탄생하는 법이다. 모든 도시가 긴장하고, 전통 귀족을 대신해서 상인, 용병대장, 사생아, 음모꾼이 지배자가 되면서 이 새로운 지배자들은 이전에는 전통과 혈통이 해결해 주던 권위와 존경을 대신해 줄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새 시대 지도자의 권위, 권력의 정당성을 역사적이고 좀 더 세련된 언어과 고귀한 가치로 표현한다면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예지를 지니고, 새로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해결해 주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리라.

그러나 현실정치에서 이런 고귀함과 역사적 사명은 먹고 마시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르네상스 시기에 새로운 통치자들은 이탈리아인의 자부심인 로마를 땅속에서 캐어내고, 화려한 건물과 조각으로 부활시켰다. 반란과 음모로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가톨릭의 교리는 부담스러우니까 라틴어와 인문교양이 오늘날의 대학 졸업장처럼 통치자의 품위와 교양을 보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런 고상해 보이는 이유 말고도 전에 보지 못하던 화려한 궁전을 짓고, 그 내부를 로마 황제나 누렸을 듯한 조각과 가구, 로마 황제도 보지 못했을 새로운 예술품으로 채우는 것은 육체적 즐거움과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정신적 안도감을 주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많은 군주가 예술과 학문에 투자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가문이 피렌체의 메디치가와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이었다.

피렌체를 떠난 레오나르도가 밀라노로 찾아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밀라노는 프란체스코의 아들인 루드비코가 통치하고 있었다. 루드비코는 세상에 없던 프란체스코의 청동기마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레오나르도의 제안에 솔깃했던 것 같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에게 당장 일을 맡기지는 않았다. 이 위대한 천재가 밀라노에 와서 처음 맡은 일은 루드비코의 부인 베아트리체의 수세식 화장실, 방의 인테리어, 마굿간 장식, 파티에서 수금 연주 등등 다빈치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릴만한 일들이었다.

루도비코를 비난하지 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레오나르에게 연봉 2000두캇이라는 어마어마한 대우를 해줬다. 한마디로 귀족처럼 살 수 있는 수입이었다. 레오나르는 귀족 같은 의복을 입고, 하인을 두고 살았다. 이 귀족 흉내는 나중에 피렌체에 와서 수입이 1/10로 줄었어도 중단하지 않았다. 웬만큼 유명한 예술가도 작품계약을 하고 받는 보수가 월 10~20두캇이면 괜찮은 시대였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제작할 때 피렌체시로부터 받은 보수가 30개월에 400두캇이었다.

밀라노 시절에 레오나르도는 2개의 걸작을 남긴다. 최후의 만찬과 프란체스코의 기마상이다. 최후의 만찬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생존해 있다. 기마상은 말 부분만 석고로 완성을 했는데, 당시에 이것을 본 사람들은 세상에 없던 작품이라고 경탄하며 축제까지 벌였다.

하지만 청동상 제작을 위해 모아둔 청동이 전쟁이 터지면서 대포 제조에 전용되었다. 이어 밀라노는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다. 루이 12세는 이 석고상을 보고 프랑스로 가져가려고 했는데, 아마도 이 과정에서 파괴된 것 같다. 루이 12세는 최후의 만찬도 벽 채로 떼어가려고 했는데, 다행히 이 시도는 실패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후의 만찬만으로도 레오나르도는 연봉의 대가는 다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었다. 작업은 찔끔찔끔하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아예 작업장에는 나타나지도 않고 바깥으로 떠도는 레오나르에 대해 수도원장이 불평을 했다.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를 불러 질책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에게 중요한 일은 실행이 아니라 구상이다.”

놀랍게도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의 이런 행동을 용납했다. 밀라노 시절에 레오나르가 얻은 것은 자유였다. 레오나르가 높은 연봉에 시시한 일만 맡으면서 허송세월한 것은 아니었다. 그처럼 부지런하고 집념에 찬 삶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밀라노 시내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인물을 스케치하고, 자연을 관찰하고, 자신의 예술에 대한 모든 기초자료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어쩌면 밀라노의 삶이 레오나르도를 망쳤을 수도 있다. 그는 평생 동안 구상과 사색에서는 우주의 끝까지 달려갔지만, 하나의 작품에 집중하지를 못했다. 하나의 작품을 구상할 때도 그의 괴이한 탐구력은 한도 끝도 없이 뻗어갔다.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도 시신 해부를 했다. 근육 구조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뚜렷이 반영되었다. 레오나르의 작품에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고, 그의 골상학적 지식을 적용하는 작품해설도 있다.

그런데 두개골 안쪽의 구조, 뇌신경, 신경섬유, 혈관, 이런 부분의 지식은 어떨까? 모나리자를 그리는데, 이런 지식이 필요했고, 반영되었을까? 밀라노에서 누군가가 레오나르의 보수와 집행내역, 행동을 관리해서 그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다빈치 씨, 뼈와 근육에 대한 연구는 이해하겠습니다. 고양이 스케치는 언제고 써먹을 때가 있을 수 있겠으니 눈 감아 주겠습니다. 하지만 새의 비행과 개구리의 점프를 연구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군요. 당신이 정원에서 멍 하니 보내는 시간은 30분까지는 허용하겠지만 그 이상은 게으름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은 보수에서 제외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술가의 사색과 빈둥거림을 최대한 이해하고 보장하는 선에서 당신에게 최소한 하루에 7시간은 일할 것, 그중 3시간은 반드시 작업장에 보낼 것을 요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계약을 취소하거나 보수의 50%를 삭감하겠습니다.”

루도비코나 밀라노의 행정관리가 레오나르도에게 이런 통지서를 보냈다면 레오나르도는 좀 더 고분고분하고, 무슨 일이든 하다 말고 버리고 떠나는 못된 버릇을 고치고, 우리가 지금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작품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가 기억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우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미완성만 남긴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예술작품을 평가할 때 1차적인 기준은 기교와 완성도이다. 좀 더 심오하다면 작품이 주는 감성표현, 스토리, 시대정신, 가치관을 언급한다. 레오나르도에겐 그 이상이 있다. 무한한 불만족과 무한한 추구이다. 그는 시대의 기술을 넘어선 아이디어와 자신의 손도 수행할 수 없는 표현을 찾았다. 그리고 그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 보통 사람의 상식과 논리적 연결을 넘어서는 영역을 무한정으로 탐구했다.

그것이 몰상식이었을까? 삶의 지혜, 일상의 영역에서 보면 분명 그의 행동은 자제해야 할 태도였다. 하지만 인류의 진보는 바로 그 상식의 연결, 상식의 고리, 보이지 않는 세계의 탐구로 이루어졌다. 세균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지가 갓 200년이다. 우주는 망원경이 개량될 때마다 100만배 이상 넓어지고 있다.

루도비코의 관용이 없었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없었다.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나올 수가 없다. 연구비란 연구비는 철저하게 행정의 룰에 묶여 있다. 민간 차원의 기부, 재단은 행정규제와 사욕, 몰상식이란 3중의 새장에 갇혀 있다.

최근 RND 카르텔이 사회의 화두이다. 나는 카르텔, 연구비 악용에 대한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런 악용을 만들어낸 주범이 ‘행정’과 규제다. 아니 더 본질은 악용이 아니라 무용이다. 천재는 왕따 시키고, 나눠먹기 돌려먹기, 하나의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100개의 무용을 요구하고 넘어간다. 이건 연구비 감독과 삭감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무탈한 무용만 만들어 낼 것이다.

루도비코는 말년이 좋지 않았다. 이탈리아에는 매국노가 되고, 프랑스에는 배신자가 되어 감옥에서 살다가 쓸쓸하게 죽어갔다. 용병대장 집안이고 메디치가에 비해서는 품격과 교양이 떨어지니 무시하는 경향도 강하다. 그런데 훨씬 부유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통치하는 이 나라는 루도비코 만큼의 관용과 안목이 없는 듯 하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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