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베트남식당은 엄청나게 긴 메뉴판이 있었고 국수, 분짜, 볶음밥의 종류도 다양했다. 가격이 저렴해 두 가지 요리를 한 번에 주문해도 부담이 없었다. 뜨끈한 국물을 먹고 난 후 식당 앞에서 느꼈던 특유의 냄새는 마치 공기처럼 편안해서 이국 생활의 고단함도 풀리는 듯했다.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나면 한국에서 먹던 기억과 겹쳐 마치 고향 음식을 먹은 것 같이 힘이 났다.
10년도 넘은 기억의 냄새를 되살린 것은 내년에 HBO에서 방영된다는 ‘동조자’라는 드라마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원작가는 베트남전을 겪고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주한 비엣 타인 응우옌이다. 원작을 읽어 보니, 책의 곳곳에는 베트남의 약재 향처럼 우리를 음식의 세계로 안내하곤 했다. 책의 주요 내용과는 별개로 나는 이 작가의 음식 묘사에 빠져들었다.
책은 매우 두껍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탓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읽는 데 석달이나 걸렸다. 주제는 다소 무겁지만 유머와 위트가 있었다. 주인공은 쌀국수를 아래와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가난해서 살코기 자체를 먹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얇은 소고기 조각들이 들어 있지 않은 쌀국수를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놀랄 만큼 향기로운 최고의 고깃국물을 끓여 냈고 나는 풍미를 더하기 위해 쇠솥에 툭 던져 넣을 생강과 양파를 불에 구워 어머니를 도왔습니다.”
마치 뜨끈한 국물과 구운 야채 향기가 느껴질 만큼 마치 내 앞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 같았다. 또한 쌀국수 국물을 자주 만들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대목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또 뼈를 뭉근히 삶는 동안 고깃국물 표면으로 끓어오른 거품을 걷어 내서 고깃국물의 맑고 진한 상태가 유지되게 했습니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먹던 음식을 소개하기도 했다. 베트남 액젓인 느억맘에 찍어 먹는 먹 노이 팃 (Muc Nhoi Thit)으로. 베트남식 오징어순대라고 할 수 있다.
“오징어 여섯 마리에 간 돼지고기, 녹두국수, 깍둑썰기한 버섯, 다진 생각을 채워 넣어 기름에 지진 다음, 찍어 먹을 라임 생강소스와 함께 차려 냈습니다.”
기름 향이 배어든 오징어와 톡 쏘는 라임 향이 바로 잎에서 나는 것 같다. 짧은 기간을 베트남에서 살고 미국으로 이주한 작가의 기억을 되살려 준 것은 무엇일까. 베트남의 멸치액젓에 진심인지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베트남 최고의 멸치액젓 산지라는 푸꾸옥섬의 느억맘을 소개하기도 한다.
“푸꾸옥섬의 그랑크루와 최고등급 안초비 젓으로 넘칠 듯한 큰 통들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요! 짙은 암갈색의 이 자극적인 액상 조미료는 짐작건대 지독한 악취 때문에 외국인들이 심히 폄하하고…우리가 바로 그 수상한 비린내가 나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쌀국수, 오징어순대 그리고 느억맘에 대한 묘사가 책의 군데군데에서 나의 미국 속 베트남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 근처에만 가도 느껴졌던 음식 향기로, 흐릿했던 동네의 기억이 복원되는 느낌도 들었다.
책 속 주인공은 미국CIA의 비밀요원이면서 베트남 공산당의 이중첩자의 삶을 살아간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결국 양쪽에서 버림받는 주인공의 선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니 책의 영상화를 통해 보면 좀 더 이해가 쉬워질 듯싶다.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일인다역으로 출연한다니 궁금증이 더해졌다. 나의 10년 전 미국 속 베트남의 기억을 살려준 책의 문구 속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아마도 주인공은 쌀국수 국물에 진심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굉장한 고깃국물을 자랑스럽게 여기셔야 합니다.”
드라마 ‘동조자’를 보면 예전의 쌀국수와 지금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는 말이 맞는 말 같다. 2024년의 멋진 드라마를 기다리며 오늘도 국물을 끓이러 간다. 전호제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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